2019년 1월 30일 수요일

양계의 추억(3)

 
양계의 추억(3) 20066
 
지난 일요일은 마침 백암 장날이었다.
끝이 1일과 6일인 날은 오일장이 선다.
11, 16, 21, 26, 뭐 그런 식인데, 큰 달, 31일이 있는 달이면 31일과 1일 이틀 연속으로 모두 장이 서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 날인 1일로 장날을 잡는다.
나는 예부터 5일 장을 사랑하였다.
딱히 뭐 살 것 없어도 사람 들과 살을 부비며, 상인 들의 호객 소리 듣는 것이 즐거우며,
누구나 그렇듯이, 사는 맛이 나는 그런 장삼이사로 변하고 만다.
이상하리만큼, 출처 불명의 무슨 억압 같은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느낌이 들곤 한다.
왁자지껄 하는 장날의 소음에 묻히고 나면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 하다.
몇 푼어치 안 되는 풋나물을 좌판에 벌려 놓고
그것도 장사랍시고 앉아있는 시골 할머니 들의 모습이 정겹다.
어떤 할머니는 한 웅큼의 버섯에다, 한 두 접의 논 마늘, 그리고 소주병에 담은 참기름
너 댓 병이 전 품목이고, 옆에는 새로 싹을 틔운 고추, 토마토, 상추, 오이 등의 모종을
팔고 있다. 포기 상추 모종은 약 50 포기 들어 있는 모판이 2천원 남짓이다.
저 한 구석에는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나무, 묘목 장수가 자리를 잡았다.
올해는 기어이 능소화 한 그루 심으리라.
눈에 안 좋다는 속설이 있지만 꽃은 너무 예쁘다.
 
임시로 장막을 쳐 놓은 목로주점에서는 대낮부터 막걸리 한 보시기에 메추리구이를 한 입 입속에 쳐 넣고는 거들먹 거리는 촌로 들의 모양새도 보아 줄 만하다.
 
그 옆 조금 한갓진 곳에는 장날 마다 나타나는 생닭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다.
알에서 갓 깬 병아리 여 닐곱 마리가 제 어미 품속으로 들락거리고,
어미가 물어주는 모이를 먹다가 뱉다가 하며 좁은 철망 안 에서 논다.
어미닭과 병아리를 같이 키우면 보기에 좋고, 손주도 좋아할 것이다.
마악 흥정을 하려고 하는데, 먼저 오신 손님이 전부 떨이해서 3만 원에 달라고 떼를 쓴다.
아주머니는 35천원이다. 손님은 3만원 밖에 없다며 그렇게 30분을 밀고 당기다가
손님의 남편임 즉한 분이 2000원을 더 내놓고 나서야 거래가 끝났다.
거래가 안 되면 내가 4만원 주고 사마고 하고 싶은 걸 꾸욱 눌러 참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도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항상 이렇게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못해 탈이다.
백 여 마리는 됨즉한 중닭이 오늘의 주 상품인 듯, 토종은 이미 다 팔려 나갔다고 한다.
레그혼종 두 세 마리와 나머지는 토종과의 혼합종이다.
오리도 갓 병아리 신세를 면해 날개에 털도 돋지 않은 놈 들이 제법 꽥꽥거리며,
그 중에 칠면조, 거위도 몇 마리씩 구색을 갖췄다.
 
이미 닭장을 만들어 놓은 나는, 중닭 4마리와 장닭(수탉 중에서 대장 노릇할 만한 놈) 한마리, 이렇게 도합 5마리의 닭을 고르고, 암놈 두 마리와 숫놈 한 마리, 이렇게 오리도 세 마리나 골랐다.
 
농협에 들르니 20 Kg 들이 닭 모이가 7천원이다.
그 정도면 이제 마악 병아리를 면한 닭들이 꽤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박스 두 통에 닭과 오리를 나누어 넣고 차에 실었다.
때가 때인지라 이같이 더운 날에는 뒷 트렁크에 있으면 십분도 견디기 힘 들거라는
닭 아줌마의 이야기다. ,
그래서, 우선 냉방을 켜놓고 상당히 시원하게 된 뒤에라야
차 뒷 좌석에 고이 모셔 집까지 이동하게 되었다.
닭 냄새가 차 구석구석에 박혀 벌써 일주일도 더 지난 지금에도 차안에서는 닭 냄새가 솔솔 풍긴다.
이제 두 세 달만 있으면, 다투어 알을 낳을 것이니 어찌 아니 즐거우랴.
원래가 도시에서 나서 자란 아내는 신기한 듯 관심이 깊다.
그러나 닭장에 넣은 지 하루도 안 되어 암탉 한마리가 다리를 절고 모이를 잘 안 먹는다.
횃대에 오르내리다 그만 낙상을 한 모양이다.
야생 상태라면 천적에게 먹히거나 굶어 죽게 마련이지만
지금이야 내 보호 하에 있으니 괜찮을 것도 같다.
차라리 고통을 줄이자면 얼른 잡아서 고아 먹는 편이 어떨까 했더니,
아내는 펄쩍 뛰며 가축병원 어쩌구 기브스 어쩌구 하며 마치 강아지나 자기 자식 다친 듯이 안쓰러워 한다.
세상에~~~ 닭다리 고친다고 기브스 해 주자는 사람은 처음이다.
다행히도 며칠이 지난 지금에는 아직 앉아 있는 시간은 많지만
모이는 열심히 먹는 것으로 보아 잘만하면 살아 날 것도 같다.
닭과 오리는 그렇게 일주일 동안에도 몰라보게 컸고 그동안에 웃자란 상추며 쑥갓은 거의 오리가 다 먹었다.
 
 

양계의 추억(2)

양계의 추억(2) 20065




나의 추억은 오랜 학창 시절과 직장 생활 그리고, 자식 들의 공부, 결혼, 출가 등으로 인해 중간에 무려 40~50년이 끊어졌다.
그러다가 꿈에 그리던 전원 생활을 하게 되면서 다시 이어지게 된다.
 
시골에서 사는 재미 중에는 물론, 채소와 나물을 직접 길러 생동생동할 때 싱싱하게
무치고, 지지고, 데쳐서 먹는 일과, 과일과 알곡을 길러 늦여름과 초가을에 따고, 캐고,
잘라내고, 갈무리하여~~ 야금야금 꺼내 먹는 일 등이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참 재미를 꼽으라면,닭오리를 직접 키워 알은 따끈할 때 꺼내 먹고,
나이 든 놈 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보양식으로 탕이나 구이를 해 먹으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닭 모가지 하나 비틀지 못하는 아내는 닭 잡는 일이며,
오리 잡는 일을 무슨 백정이나 하는 일인 양 아주 싫어한다.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말로는 살생을 싫어한다지만 실상 아내는 소나 돼지는 물론이요, 개고기까지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떻든 아내는 곤충 등은 물론이고 동물을 집안에 키우는 일을 반대해 왔다.
하물며 강아지나 고양이도 집에서 키울 수가 없었다.
토끼도 자연산으로 있는 놈만 상대했지, 키워 볼 생각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아내에게는 중요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어떤 짐승이든, 하물며 물고기까지도 제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부처님 같은 말씀인데, 말이야 맞는 말이다.
사람은 굶을지언정 자기가 기르고 있는 짐승을 굶기는 일은, 자고로
사람으로써 차마 못 할 일이라고 어른 들이 말씀 하던 터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탈감작(desensitization) 작전을 짜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참이다.
탈감작이란 말은 원래 의학용어로써 어떤 물질에 과민한 사람에게 조금씩 익숙하게 하여
과민반응을 치료 하는 방법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야금야금 접근해 가는 치료법이다.
이 치료법(?)이 성공 단계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물고기를 기르다가 이제 닭과 오리를 키우기 까지, 큰 합의(?)를 본 것이다.
중간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류독감인가 무언가 때문에 시사에 밝은 아내는 닭고기도 못 먹게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하물며 키운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동물을 키우려는 것은 나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런 일 이외에도 엄청 할 일이 많고 취미도 다양하기 때문에 짐승을 키운다는 것도 알고 보면 나에게는 약간은 귀찮은 일이기도 하였다.
내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면 짐승을 키운다는 것이 정신적인 치료 효과가 크다고 본다.
아내는 요 근래,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몇 가지 고통을 겪고 있다.
그중의 대부분은 나와 공유하는 일이지만,
엄마로써, 자식으로써, 며느리로써, 아내로써, 또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건강 문제 때문에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한 인간으로써
참으로 어려운 일들에 봉착해 있다.
애비로써, 자식으로써, 사위로써, 지아비로써 느끼는 나의 어려움을 능가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내 관찰에 의하면 아내는 텃밭에서 일하고 난 후, 또는 꽃을 심고 난 후,
상태가 많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자연요법이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을 키우는 것은 어떨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며칠 전 욕 먹을 셈치고 애완견용으로 쓰는 철망장을 하나 샀다.
가로 세로 70-90 cm 정도이고, 높이도 60 cm 내외이니
씨암탉을 두 마리 정도 키우면 알도 얻고 고기도 얻을 수 있을 것이지만
우선은 아내의 관심을 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 몰래 마당 한 구석에 설치하고는 알 낳을 둥지도 대충 만들었다.
 
저녁에 내 작품(?)을 본 아내는 대뜸 야단을 친다.
"아니, 조러케 쫍은 닭장에서 어떠케 키웁니까?
이건 완존히 동물 학대 하려고 그래요?
째째하게 굴지 말고 당신이 좋아하는 목수 솜씨 발휘해서 제대로 닭장을 크게 만드세요.
남아 있는 목재 어따 쓸꺼예요? 그리구, 닭 뿐만 아니라 오리도 키우면 재밌대요."
"???"
 
이제 다른 걱정이 생겼다.
집을 며칠 씩 비우려면(마침 동남아 관광계획을 세웠었다),
자동급수기며, 자동급식(급이라고도 한다)장치를 달아야 하게 생겼고,
고양이, 야생너구리, 족제비, 하물며 쥐 들로 부터 닭과 알을 보호할 철망도 설치 하여야 한다.
지금 나는 며칠 동안 닭장을 만드느라 여념이 넚없지만, 지켜보는 아내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 것 같아 즐겁다.
다음 장날에는 씨암탉으로 굵은 레그혼(이 종류가 알을 많이 낳는다) 몇 마리와
짝이 되는 기운 좋은 장닭을 한 마리 사고, 집오리도 한 쌍 사서 넣어야지.
 
새벽이면 수탉 홰치는 소리에 잠을 깰 것이고, 내년에는 병아리도 열 두어 마리 정도
깼으면 하고 머리에 그려본다.

2019년 1월 29일 화요일

양계의 추억(1)

양계의 추억(1)

1952~1956 ?
오늘 아내가 닭곰탕을 끓였다. 내가 닭띠라서 그런지 나는 유난히 닭요리를 좋아한다.
미국식 후라이드 치큰은 물론이고, 닭볶음, 닭똥집볶음, 닭백숙, 닭갈비, 닭곰탕, 닭조림, 찜닭, 닭봉튀김 등 모두를 좋아하는데, 특히 닭도리탕을 제일 좋아한다.
닭볶음닭도리탕이라고 하다가 국어 순화운동으로 닭볶음으로 바뀐 모양인데, 우리 집에서는 그냥 닭도리탕이라고 부른다. 도리()는 새()를 뜻하는 일본어이지만, 알고 보면 거의 모든 일본어가 원래 우리말이 변형 된 것으로 보아 도리’=‘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구태여 흔하게 쓰는 말을 우겨서 순화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닭도리탕은 그러면 닭닭탕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일본어로 닭은 니와토리(にわとり), 마당의 새라고 하지만 상고 시대로부터의 언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漢子, 심지어 英語 등의 어원이 한국어라는 것을 알게되면 까무러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식한 백성을 위해 설명을 자제한다.
나는 어려서 6.25 피난 시절, 초등학교(국민학교) 1, 2, 3 학년을 報恩이라는 충청북도
시골에서 보냈다. 당시는 모든 국민 들이 굶주리던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다행히 부친이
타올 공장을 운영해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닭장을 하나 운영(?)해 보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닭을 50 여 마리 정도 키웠다.
운영이란 거창한 용어를 쓰긴 했지만 당시에 나의 일과는 학교 다니는 시간을 빼면
온통 닭기르기로 채워졌다. 養鷄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좀 그렇지만,
닭을 키우는 데 있어서 기본은 닭 사료의 조달이었다. 飼料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은
요사이 같이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도 굶고 있는 형편에 곡식을
나우어 줄 형편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학교에 가는 시간에는 닭장 문을 열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들이 알아서 자체 조달해서 연명하라하고, 방과 후에는 아우(남동생)와 함께
개구리, 뱀 등을 사냥(?)해서 단백질을 보충했다. 닭 들은 개구리를 엄청 좋아했다.
뱀은 자주 잡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닭장 옆에 부수입 삼아 키우던 돼지 들의 간식거리였다.
가을이면 벼이삭에 새까맣게 붙어있던 메뚜기 들이 닭 먹이로 제격이었다. 당시에는 농약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메뚜기 들이 정말 흔했고 메뚜기는 닭 뿐 아니라 사람 들의 반찬으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소금을 약간 뿌려 알맞게 볶으면 도시락 반찬도 되었다. 사실 3학년 이상은 도시락을 지참하도록 하여 오후 수업을 진행하였지만, 도시락을 갖고 오지 못하는 학생 들이 태반이었고 보리밥이나마 가지고 올 수 있으면 부자 축에 끼였다. 김치는 꿈도
꿀 수 없으니 볶은 메뚜기가 반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내가 키우던 닭은 레그혼(Leghorn) 품종으로 산란용이라서 달걀 생산이 많았다. 일 년에 280 개 정도 낳는다고 했으니 일주일에 마리 당 5~6개 정도로 다산이었다. 육계로 키우던 소위 토종닭도 몇 마리 있었으나 대개 사람 들의 단백질 원으로 없어지곤 했다.
암탉 40여 마리가 생산해 내는 달걀은 실로 엄청났다. 그러나, 나는 달걀을 먹어 보거나, 하다못해 달걀찜도 구경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닭을 키우는 것은 내 책임이었으나 닭과 달걀의 처분권은 아버지에게 있었고, 나는 한 번도
그 일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모든 것이 표준이었고
당연한 일이거니 했다.
 
아버지는 타올 짜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물자가 귀했던 당시에 타올 생산은 획기적인
일이었고 없어서 못파는 대호황 직업이었다. 돌이켜보면 지금 S타올이 출현하기 훨씬 전에
거의 우리나라 최초가 아니었나 싶다.
報恩 시골에는 正二品 松으로 유명한 소위 연걸이소나무 촌락, 장안이라는 곳에 솜씨가 뛰어났던 목수가 한 분 살았다. 이 분이 어머님의 작은 아버지(숙부님)었으니 나에게는
작은 외할아버지다. 나의 외가는 이북 평안북도 영변에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시대
학교를 세워서 후진 양성에 온 재산을 쏟은 분이었고, 그 동생은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타지로 나가 목수로 돈을 벌었다. 이 분이 어쩌다가 보은에 자리를 잡고 전쟁 와중에
배틀을 만들어 타올을 짜게 한 것이었다. 당시에 보은 군 내에는 전쟁 미망인이 많았고
그 들을 먹여 살릴 길이 막막하던 차에 군수 님이 우리 작은 외할아버지 소식을 듣고는
사정하여 배를 짜는 기계를 만들게 하여 공장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손재주가 뛰어났던 이 분은 불과 일년도 안되어 타올짜는 기계를 30 여대나 맨 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공장 부지와 물자는 물론 군에서 지원 하였으나 이를 손수 만든 것은 작은 외할아버지였고, 공장을 이어받아 운영한 것은 우리 아버지였다. 당시로는 일본 유학파가 매우 귀하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도처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공장부지는 예부터 베짜기가 성했던 베뜰이란
동네에 자리 잡았다.
일제 시대에 전국의 이름을 한자식으로 고쳐서 베뜰배뜰로 잘못 알아 그랬는지
배를 많이 생산해서 그랬는지 여튼 梨坪이라고 했다. 실제로 우리 동네에는 배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멋있는 재래식 이름이 이런 식으로 전부 고쳐졌다.
우리 배뜰에서 고개를 넘어 속리산 쪽으로 가다보면 바람이 많이 부는 고개가 있는데, ‘바람부리라는 멋진 이름이었으나 일본인 들은 風吹(풍취)로 바꾸었고, 외할아지가 사시던 장안(동학의 본부로 유명 했던 곳)은 장내(帳內)로 바뀌었다. 더 웃기는 것은 장안이
報恩面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독립적인 으로 승격함에 따라 長安面 帳內里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로 되었다. 생각이 없던 괸리 들이 장안도 아니고 장내도 아닌 어중간한 곳으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지명은 아니지만, 정이품송은 원래 연걸이소나무였다.
조카를 죽였던 벌을 받아 피부병이 심했던 세조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속리산으로 가던 중 타고 가던 손수레인 연()이 소나무 가지에 걸리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세조 일당을 통과시켜 주어 받은 벼슬이었다. 사람이 아닌 물건에 벼슬을 준 것이 이것이 유일할 것이다.
 
그 아버지. 철이 들어 가면서, 그 분의 일을 알게 되면서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낀다. 내가 생산(?)했던 거의 배부분의 달걀을 수거해서 당시에 공장에서 일하던 젊은
미망인 들에게 점심 시간에 나누어 주었던 것. 당시에 일하던 미망인 들은 고구마 정도를 점심으로 가져 올 정도로는 되었으나 반찬이 없거나 하여 처음에는 반찬거리로 쓰라고 주던 것인데 이 들이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 가서는 아이 들이며, 부모 봉양에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는, 생산되는 즉시로 모두 모아서 그들에게 주었으니 우리가 먹을 것은 남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들은 우리 아버님을 사장님이니, 대표님이니 부르지 않고, 아버님이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휴식 시간 때는 직원 들에게 간단한 四字成語를 설명해주거나
미군 들을 만나면 건넬 수 있도록 영어 인사 말 정도를 가르쳐 주곤 하셨다. 일본어는 능통 하였지만 절대로 일본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들에겐 정신적인 기둥이었다. 남편 들을 잃은 과부 들은 그렇게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도움을 받으면서 위안을 삼았다.
집에서 기르던 똥개 한 마리가 있었다. 똥개지만 영리해서 竹田里(보은군)에서 梨坪里
이사할 때 아버지가 몰래 떨구고(나중에 알고 보니 그집 할머니 보양으로 쓰시라고 주고 왔다고 함) 왔으나 그 개가 어떻게 왔는지 내 교실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 강아지가 중개가 다 된 어느 날. 갑자기 목끈을 달아서 아버지에게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함을 감지한 내가 나서서 한사코 막았으나 아버지의 완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 날을 예견한 듯, 그 개는 완강하게 버티면서 날 쳐다보던 눈이 지금도 꿈에 나타나곤 한다. 결국은 혼자 살면서 병(결핵)을 앓고 있던 독거노인(노파)에게 보신용으로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맹세했다. 이 다음에 아버지가 늙으면 돌보지 않을 것이다. 그냥 혼자 돌아가시게 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맹세했던 것이 아버지의 한 마디에 그냥 녹아버렸다. “사람이 먼저다. 나중에 더 예쁜 강아지 한 마리 구해 주마아버지의 책상 머리에는 항상 人乃天 輔國安民 廣濟蒼生이란 문구가 걸려 있었다.
그는 동학교도의 후손이었다. 피난 당시 동학의 집산지였던 장안 가까이 이사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변에 계시던 외할아버지는 일제 시대 당시 한 반도의 북쪽 절반을 책임지던 동학(나중에 천도교로 개칭)의 접주(북쪽 대표)로 국민 계몽과 교육에 온 몸과 재산을 불살랐던 것이다.
닭 들을 낮에 마당에 풀어 놓았더니 가끔 싸리 울타리 사이로 빠져 나가 이웃 놈 들과
교류를 하는 통에 내 것 남 것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모두 들 레그혼을 길렀으므로 내 것이라 우기면 방법이 없었다. 한 번은 우리 집 암탉 중에 벼슬 모양이 조금 다른 놈이 있었는데 이놈이 옆집으로 빠져서 그 집 수탉과 연애를 하였다. 그리고는 저녁에 그 집 닭장에서
자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내 닭인 걸 금방 알았지만 욕심많은 하찌로 아버지는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며 돌려주지 않았다.
그 집에는 나보다 세 살 정도 위인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하필 이름이 하찌로(八郞, 여덟째 아들이라는 일본식 이름)였다. 그 위의 형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외아들이었다. 아주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그 아버지, 영감은 아주 심술이 사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십 환에 열 개주는 비가(발음 확실치 않다)라는 사탕을 11개나 12개를 주지는 않고 그 날 기분에 따라 여덟 개나 아홉 개 밖에 안 주었다. 동네 10리 안에 구멍가게가 이것 밖에 없으니 사탕을 먹고 싶으면 어쩔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였다.
이 영감이 우기면 그게 법이고 정답이었다. 우리 아버지에게 설명을 해 주어도 원래 우리 아버지는 이웃과 다투기는커녕 필요하시면 한 마리 더 가져가라 하실 분이니 혼자만 앓다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우리 집은 타올 공장이기 때문에 염색 약이 많았다. 그 중에서 눈에 잘 띄는 빨간 색을 골라 밤중에 닭장에 들어가서 등에다 모두 자를 그렸다. 채씨네 닭이라는 뜻이다. 이후에는 하찌로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집에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지만 닭과는 먹이도 나눠먹고 어울려 잘 놀곤 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고양이란 것이 없었다. 책에서는 보았지만 실물을 구경하지 못했다. 닭 들에겐 너무 다행이었다.
출입문만 잘 챙겨두면 외부 침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닭 들은 저물기 전에 모두 열심히 귀가하였다. 밤이면 속리산 줄기인 뒷산에서 늑대 들이 울곤 했지만 동네 피해는 어쩌다가 새끼 돼지의 피해만 있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