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9일 화요일

양계의 추억(1)

양계의 추억(1)

1952~1956 ?
오늘 아내가 닭곰탕을 끓였다. 내가 닭띠라서 그런지 나는 유난히 닭요리를 좋아한다.
미국식 후라이드 치큰은 물론이고, 닭볶음, 닭똥집볶음, 닭백숙, 닭갈비, 닭곰탕, 닭조림, 찜닭, 닭봉튀김 등 모두를 좋아하는데, 특히 닭도리탕을 제일 좋아한다.
닭볶음닭도리탕이라고 하다가 국어 순화운동으로 닭볶음으로 바뀐 모양인데, 우리 집에서는 그냥 닭도리탕이라고 부른다. 도리()는 새()를 뜻하는 일본어이지만, 알고 보면 거의 모든 일본어가 원래 우리말이 변형 된 것으로 보아 도리’=‘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구태여 흔하게 쓰는 말을 우겨서 순화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닭도리탕은 그러면 닭닭탕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일본어로 닭은 니와토리(にわとり), 마당의 새라고 하지만 상고 시대로부터의 언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漢子, 심지어 英語 등의 어원이 한국어라는 것을 알게되면 까무러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식한 백성을 위해 설명을 자제한다.
나는 어려서 6.25 피난 시절, 초등학교(국민학교) 1, 2, 3 학년을 報恩이라는 충청북도
시골에서 보냈다. 당시는 모든 국민 들이 굶주리던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다행히 부친이
타올 공장을 운영해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닭장을 하나 운영(?)해 보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닭을 50 여 마리 정도 키웠다.
운영이란 거창한 용어를 쓰긴 했지만 당시에 나의 일과는 학교 다니는 시간을 빼면
온통 닭기르기로 채워졌다. 養鷄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좀 그렇지만,
닭을 키우는 데 있어서 기본은 닭 사료의 조달이었다. 飼料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은
요사이 같이 시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도 굶고 있는 형편에 곡식을
나우어 줄 형편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학교에 가는 시간에는 닭장 문을 열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들이 알아서 자체 조달해서 연명하라하고, 방과 후에는 아우(남동생)와 함께
개구리, 뱀 등을 사냥(?)해서 단백질을 보충했다. 닭 들은 개구리를 엄청 좋아했다.
뱀은 자주 잡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닭장 옆에 부수입 삼아 키우던 돼지 들의 간식거리였다.
가을이면 벼이삭에 새까맣게 붙어있던 메뚜기 들이 닭 먹이로 제격이었다. 당시에는 농약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메뚜기 들이 정말 흔했고 메뚜기는 닭 뿐 아니라 사람 들의 반찬으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소금을 약간 뿌려 알맞게 볶으면 도시락 반찬도 되었다. 사실 3학년 이상은 도시락을 지참하도록 하여 오후 수업을 진행하였지만, 도시락을 갖고 오지 못하는 학생 들이 태반이었고 보리밥이나마 가지고 올 수 있으면 부자 축에 끼였다. 김치는 꿈도
꿀 수 없으니 볶은 메뚜기가 반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내가 키우던 닭은 레그혼(Leghorn) 품종으로 산란용이라서 달걀 생산이 많았다. 일 년에 280 개 정도 낳는다고 했으니 일주일에 마리 당 5~6개 정도로 다산이었다. 육계로 키우던 소위 토종닭도 몇 마리 있었으나 대개 사람 들의 단백질 원으로 없어지곤 했다.
암탉 40여 마리가 생산해 내는 달걀은 실로 엄청났다. 그러나, 나는 달걀을 먹어 보거나, 하다못해 달걀찜도 구경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닭을 키우는 것은 내 책임이었으나 닭과 달걀의 처분권은 아버지에게 있었고, 나는 한 번도
그 일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모든 것이 표준이었고
당연한 일이거니 했다.
 
아버지는 타올 짜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물자가 귀했던 당시에 타올 생산은 획기적인
일이었고 없어서 못파는 대호황 직업이었다. 돌이켜보면 지금 S타올이 출현하기 훨씬 전에
거의 우리나라 최초가 아니었나 싶다.
報恩 시골에는 正二品 松으로 유명한 소위 연걸이소나무 촌락, 장안이라는 곳에 솜씨가 뛰어났던 목수가 한 분 살았다. 이 분이 어머님의 작은 아버지(숙부님)었으니 나에게는
작은 외할아버지다. 나의 외가는 이북 평안북도 영변에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 시대
학교를 세워서 후진 양성에 온 재산을 쏟은 분이었고, 그 동생은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좋아 타지로 나가 목수로 돈을 벌었다. 이 분이 어쩌다가 보은에 자리를 잡고 전쟁 와중에
배틀을 만들어 타올을 짜게 한 것이었다. 당시에 보은 군 내에는 전쟁 미망인이 많았고
그 들을 먹여 살릴 길이 막막하던 차에 군수 님이 우리 작은 외할아버지 소식을 듣고는
사정하여 배를 짜는 기계를 만들게 하여 공장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손재주가 뛰어났던 이 분은 불과 일년도 안되어 타올짜는 기계를 30 여대나 맨 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공장 부지와 물자는 물론 군에서 지원 하였으나 이를 손수 만든 것은 작은 외할아버지였고, 공장을 이어받아 운영한 것은 우리 아버지였다. 당시로는 일본 유학파가 매우 귀하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도처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공장부지는 예부터 베짜기가 성했던 베뜰이란
동네에 자리 잡았다.
일제 시대에 전국의 이름을 한자식으로 고쳐서 베뜰배뜰로 잘못 알아 그랬는지
배를 많이 생산해서 그랬는지 여튼 梨坪이라고 했다. 실제로 우리 동네에는 배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멋있는 재래식 이름이 이런 식으로 전부 고쳐졌다.
우리 배뜰에서 고개를 넘어 속리산 쪽으로 가다보면 바람이 많이 부는 고개가 있는데, ‘바람부리라는 멋진 이름이었으나 일본인 들은 風吹(풍취)로 바꾸었고, 외할아지가 사시던 장안(동학의 본부로 유명 했던 곳)은 장내(帳內)로 바뀌었다. 더 웃기는 것은 장안이
報恩面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독립적인 으로 승격함에 따라 長安面 帳內里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장내리)로 되었다. 생각이 없던 괸리 들이 장안도 아니고 장내도 아닌 어중간한 곳으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지명은 아니지만, 정이품송은 원래 연걸이소나무였다.
조카를 죽였던 벌을 받아 피부병이 심했던 세조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속리산으로 가던 중 타고 가던 손수레인 연()이 소나무 가지에 걸리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세조 일당을 통과시켜 주어 받은 벼슬이었다. 사람이 아닌 물건에 벼슬을 준 것이 이것이 유일할 것이다.
 
그 아버지. 철이 들어 가면서, 그 분의 일을 알게 되면서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낀다. 내가 생산(?)했던 거의 배부분의 달걀을 수거해서 당시에 공장에서 일하던 젊은
미망인 들에게 점심 시간에 나누어 주었던 것. 당시에 일하던 미망인 들은 고구마 정도를 점심으로 가져 올 정도로는 되었으나 반찬이 없거나 하여 처음에는 반찬거리로 쓰라고 주던 것인데 이 들이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 가서는 아이 들이며, 부모 봉양에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는, 생산되는 즉시로 모두 모아서 그들에게 주었으니 우리가 먹을 것은 남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들은 우리 아버님을 사장님이니, 대표님이니 부르지 않고, 아버님이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휴식 시간 때는 직원 들에게 간단한 四字成語를 설명해주거나
미군 들을 만나면 건넬 수 있도록 영어 인사 말 정도를 가르쳐 주곤 하셨다. 일본어는 능통 하였지만 절대로 일본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들에겐 정신적인 기둥이었다. 남편 들을 잃은 과부 들은 그렇게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도움을 받으면서 위안을 삼았다.
집에서 기르던 똥개 한 마리가 있었다. 똥개지만 영리해서 竹田里(보은군)에서 梨坪里
이사할 때 아버지가 몰래 떨구고(나중에 알고 보니 그집 할머니 보양으로 쓰시라고 주고 왔다고 함) 왔으나 그 개가 어떻게 왔는지 내 교실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 강아지가 중개가 다 된 어느 날. 갑자기 목끈을 달아서 아버지에게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함을 감지한 내가 나서서 한사코 막았으나 아버지의 완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 날을 예견한 듯, 그 개는 완강하게 버티면서 날 쳐다보던 눈이 지금도 꿈에 나타나곤 한다. 결국은 혼자 살면서 병(결핵)을 앓고 있던 독거노인(노파)에게 보신용으로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맹세했다. 이 다음에 아버지가 늙으면 돌보지 않을 것이다. 그냥 혼자 돌아가시게 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맹세했던 것이 아버지의 한 마디에 그냥 녹아버렸다. “사람이 먼저다. 나중에 더 예쁜 강아지 한 마리 구해 주마아버지의 책상 머리에는 항상 人乃天 輔國安民 廣濟蒼生이란 문구가 걸려 있었다.
그는 동학교도의 후손이었다. 피난 당시 동학의 집산지였던 장안 가까이 이사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변에 계시던 외할아버지는 일제 시대 당시 한 반도의 북쪽 절반을 책임지던 동학(나중에 천도교로 개칭)의 접주(북쪽 대표)로 국민 계몽과 교육에 온 몸과 재산을 불살랐던 것이다.
닭 들을 낮에 마당에 풀어 놓았더니 가끔 싸리 울타리 사이로 빠져 나가 이웃 놈 들과
교류를 하는 통에 내 것 남 것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모두 들 레그혼을 길렀으므로 내 것이라 우기면 방법이 없었다. 한 번은 우리 집 암탉 중에 벼슬 모양이 조금 다른 놈이 있었는데 이놈이 옆집으로 빠져서 그 집 수탉과 연애를 하였다. 그리고는 저녁에 그 집 닭장에서
자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내 닭인 걸 금방 알았지만 욕심많은 하찌로 아버지는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며 돌려주지 않았다.
그 집에는 나보다 세 살 정도 위인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하필 이름이 하찌로(八郞, 여덟째 아들이라는 일본식 이름)였다. 그 위의 형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외아들이었다. 아주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그 아버지, 영감은 아주 심술이 사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십 환에 열 개주는 비가(발음 확실치 않다)라는 사탕을 11개나 12개를 주지는 않고 그 날 기분에 따라 여덟 개나 아홉 개 밖에 안 주었다. 동네 10리 안에 구멍가게가 이것 밖에 없으니 사탕을 먹고 싶으면 어쩔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였다.
이 영감이 우기면 그게 법이고 정답이었다. 우리 아버지에게 설명을 해 주어도 원래 우리 아버지는 이웃과 다투기는커녕 필요하시면 한 마리 더 가져가라 하실 분이니 혼자만 앓다가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우리 집은 타올 공장이기 때문에 염색 약이 많았다. 그 중에서 눈에 잘 띄는 빨간 색을 골라 밤중에 닭장에 들어가서 등에다 모두 자를 그렸다. 채씨네 닭이라는 뜻이다. 이후에는 하찌로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집에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지만 닭과는 먹이도 나눠먹고 어울려 잘 놀곤 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고양이란 것이 없었다. 책에서는 보았지만 실물을 구경하지 못했다. 닭 들에겐 너무 다행이었다.
출입문만 잘 챙겨두면 외부 침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닭 들은 저물기 전에 모두 열심히 귀가하였다. 밤이면 속리산 줄기인 뒷산에서 늑대 들이 울곤 했지만 동네 피해는 어쩌다가 새끼 돼지의 피해만 있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

댓글 1개:

  1. 동학이 발생한 곳은 전북 고부, 정읍이었지만, 실제로 제일 큰 싸움을 벌렸던 곳은 보은 장안의 三山城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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